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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드러낸 18세 강훈 “진심으로 죄송”… 시위 여성들 “모든 가해자 신상 공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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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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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8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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檢, 조주빈 공범 ‘부따’ 첫 조사
고개 숙인 강훈, 추가질문엔 함구
경찰, 박사방 회원 10여명 더 찾아 총 40여명 수사중… 미성년도 포함
‘박사방 영상’ 유포 30대 승려 구속

17일 서울 종로경찰서에서 성 착취 동영상을 유포한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의 10대 공범인 강훈이 경찰에게 이끌려 이동하고 있다. 이날 강훈의 얼굴이 공개됐으며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죄송하다. 정말 진심으로 사죄드리고 죄송하다”고 말했다. 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성 착취 동영상 등을 제작 유포한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25)의 10대 공범인 대화명 ‘부따’ 강훈(18·수감 중)의 얼굴이 공개됐다.

서울지방경찰청은 구속된 강훈을 17일 검찰로 송치했다. 강훈은 이날 서울중앙지검 청사로 이동하면서 종로경찰서 현관 포토라인에 섰다. 그는 손이 포승줄에 묶인 채 모자와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고 얼굴을 드러냈다. 고개를 푹 숙인 강훈은 ‘피해자들에게 할 말이 있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작은 목소리로 “죄송하다. 정말 진심으로 사죄드리고 죄송하다”고 짧게 답했다. ‘혐의를 인정하느냐’, ‘조주빈의 지시를 받아 움직였느냐’ 등 추가 질문에는 함구했다.

강훈은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상 음란물 제작 배포 등의 혐의를 받고 있다. 전날 서울경찰청은 신상공개 심의위원회를 개최한 뒤 ‘성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에 따라 강훈의 나이와 이름, 얼굴 등 신상정보 공개를 결정했다. 2010년 피의자 신상정보 공개 제도가 도입된 뒤 10대 피의자의 신상이 공개된 건 처음이다.

강훈의 변호를 맡은 강철구 변호사는 서울행정법원에 신상공개 처분을 취소해달라는 소송과 함께 집행정지도 신청했지만 기각됐다. 법원은 “공공의 정보에 관한 이익이 강훈의 명예, 미성년자인 강훈의 장래 등 사익에 비해 압도적으로 우월하므로 신상을 공개할 필요성이 인정된다”고 밝혔다.

17일 종로경찰서 앞에는 ‘n번방 성 착취 강력처벌 촉구시위’ 시민단체에 속한 여성 5명이 시위했다. 이들은 ‘n번방에서 감방으로’, ‘n번방에 입장한 너흰 모두 살인자다’를 반복해서 외쳤다. 시위에 참여한 여성들은 “많은 여성들이 사법 기관을 지켜보고 있다. 모든 가해자들의 신상이 밝혀질 때까지 우리는 멈추지 않겠다”고 했다.

군 수사당국은 조주빈의 또 다른 공범인 현역 육군 일병 A 씨에 대해서도 군 검찰의 수사가 마무리되면 신상 공개 여부를 검토할 방침이다. A 씨는 박사방에서 ‘이기야’란 대화명으로 활동하며 성 착취 영상물을 유포한 혐의 등을 받고 있다. 법무부는 아동 성 착취물을 소지만 하더라도 유죄가 확정되면 신상정보를 공개하는 입법을 추진하기로 했다.

경찰은 조주빈과 공범들이 사용한 가상화폐 지갑주소(계좌)의 거래 명세 등을 분석해 ‘박사방’ 유료회원 10여 명을 추가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경찰은 박사방의 유료회원 40여 명을 수사하고 있다. 경찰이 파악한 유료회원에는 일부 미성년자가 포함돼 있으며 20, 30대가 가장 많다. 경찰은 박사방 참여자와 유료회원 등에 대한 추가 수사를 계속할 방침이다.

경찰은 서울 송파구 위례동주민센터 직원 2명을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등의 혐의로 17일 입건했다. 위례동주민센터는 6일 주민센터 홈페이지에 조주빈의 공범이 유출한 것으로 추정되는 피해자들의 개인정보를 게시했다. 당시 공고 내용을 읽고 피해자에 해당되면 주민센터로 연락하라고 했다. 공고에는 개인정보 유출 피해자 200여 명 가운데 일부 이름과 성별, 나이, 개인정보 유출 날짜 등이 적혀 있었다.

한편 수원지검 여성아동범죄조사부(부장검사 전현민)는 ‘박사방’ 등에서 유포된 성 착취물을 입수해 인터넷 메신저인 텔레그램 채팅방에 올린 승려 B 씨(32)를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B 씨는 2016년부터 지난달까지 사이트 4개를 운영하면서 8043건의 성 착취물을 유포한 혐의를 받고 있다. 지난달 20일 경기 광명시 자택에서 체포됐을 당시 B 씨는 총 1260건의 성 착취물을 자신의 스마트폰과 컴퓨터에 소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신지환 jhshin93@donga.com·구특교 / 수원=이경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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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회] 해방을 맞아 주시경 선생의 추모사업은 활기를 찾았다

[오마이뉴스 김삼웅 기자]

 
1945년 해방을 맞아 주시경 선생의 추모사업은 활기를 찾았다.

1946년 4월 선생의 셋째 아들 주옥산은 어버이를 추모하는 뜻으로 장지영의 '서문'을 붙여 『조선어문법-주시경 선생 유고』를 정음사에서 간행하였다.
 
유고집은 1984년 4월 민속원에서 『주시경선생 유고』로 개제되어 다시 간행되고, 권덕규의 「소전(小傳)」과 이병기의 「한힌샘 스승님」이란 시조, 장지영의 '서문'을 새로 실었다.
 
▲ 한글회관 앞의 주시경 선생 흉상 한글회관 앞의 주시경 선생 흉상

 
유고집에는 선생이 쓰셨던 「조선어 문전음학」, 「조선어 문법」, 「말의 소리」등 주요 저술이 원문대로 실렸다. 서문의 몇 대목을 뽑았다.

이 세계에서 남의 나라 침략을 일삼는 악독한 제국주의국가는, 저 혼자 잘 살기 위하야, 남들의 목숨과 천량을 빼앗으러 들때, 그것을 길이 길이 제것을 만들고자 하는 방법으로, 그 나라 사람의 역사를 없애며, 말을 없애며, 글을 없애려 한다.
 
우리는 왜적에게, 이 참혹한 시험을 당하였다. 우리의 역사를 앎으로, 또는 배움으로 죽임을 입었으며, 우리 말과 글을 캐어 알고, 바로 잡아 펴려 하다가 악독한 형벌을 받으며 또 목숨을 빼앗겼다.

내가 이 스승을 처음 모시게 된 것은 기원 사천이백사십일년 여름이니, 그때 스승이 제2회 국어강습회를 남대문 안 상정승골 청년학원안에 열으셨을제, 내가 거기에 입학하여 스승께 우리 말법을 배웠나니, 이것이 처음으로 국어와 친하게 된 것이었다.
 
그로부터 스승께 가까이 하게 돼서 스승의 뜻하시는 바와, 겪으시는 바를 잘 알게 되었다. 스승은 살림이 몹시 가난하되, 조금도 거기에 굽히지 아니하시고 견디고 이기며 오직 한 마음이, 우리 말과 글을 잘 다듬고 바로 잡아, 우리 겨레에게 널리 가르쳐서, 우리 겨레로 하여금 자주독립 정신이 일어나도록 하기에만 있었다.
 
그러다가 몇해 지나 슬프게도 경술년 가을에, 왜적이 마침내 우리나라를 빼앗아가매, 스승은 우리 몇 사람과, 땅을 두드리고 하늘을 부르며 목을 놓아 울었다. 그러다가 스승은 웨쳤다. "한갓 울어서 아니된다. 우리는 우리 나라를 다시 찾기로, 굳게 맹세하고 함께 일해야 한다. 죽기까지 힘쓰자" 하고, 그뒤로 젊은 국민을 가르치는 것이, 시급한 일이라 하여, 여러 학교의 국어과목을 맡아, 날마다 동으로 서으로 돌아다니면서 가르치느라고, 나중에는 기운이 다하여, 교단에 쓰러지기 몇 번이다가, 마침내 기원 사천이백십사년 여름에 이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다.
 
스승의 뜻을 이루지 못하시고, 돌아가신 이를 생각할 때에, 슬픔은 날이 감을 따라 깊었었다. 하물며 오늘날 왜적을 쫓아내고 우리 나라를 찾게되는 때, 더욱 우리 글을 이처럼 다시 찾아 떠바치고 외치게 되매, 아아! 우리 스승은 이러한 경사를 못 보시니, 참으로 슬픔을 누를 길이 없도다. 스승의 맑으신 넋이 하늘 위에 계셔서, 혹시나 이 셈판을 내려다 보시고 빙긋이 웃으시는지, 알길이 바이 없으매, 홀로 가슴만 뛰어지는도다.
 
이때 스승의 착한 아드님이 돌아가신 어버이를 우러러 사모하며, 스승의 끼치신 글발을 거두어, 이를 막어 세상에 펴고자할 때에, 나더러 사연을 한줄 적으라하니, 이제 나는 내 글발을 바들고, 마치 스승의 얼굴을 다시 뵈옵는 듯하여 천만오리 마음의 실마리는 얽흐러져 결을 잡을 바를 모를 새, 이에 나의 심정을 두어 마디로 적어. 다시금 스승을 사모한다. (주석 2)

주석
2> 장지영, 「서문」, 『주시경선생 유고』, 2~3쪽, 민속원,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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